문화복지에 대해 오랜만에 고민할 기회를 가졌다.
감사하게 옥희살롱에서 기회를 주셔서, 오랜만에, 충분히. 이야기해볼 수 있었다. 간만에 정말 짧았던 2시간반.

문화복지란 의미는 흔히 떠올려지는 그런 것들일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공연이나 전시 티켓을 무료로 주는 것", "시골에서 유명 뮤지컬이나 연극을 (무료로) 보여주는 것"-이런 것들 말이다. 그리고 이런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문화복지정책들이 현재 이루어지고 있다. 문화(예술)를 소외된 ("가난한" "시골" 같은..) 집단에 전달/전파한다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문화복지가 정말 그런 것인가. 혹은 그런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정말 어려운 질문이다. 

 

예술경영이 "예술"+"경영"인가 아니면, "예술경영"이란 하나의 새로운 개념인가에 대한 논의처럼,
문화복지 역시 "문화"+"복지"인가 아니면, "문화복지"란 하나의 새로운 개념인가에 대해 질문할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문화복지란 기존의 "복지"개념이나 정책과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문화복지는 문화(예술)적인 복지가 아니며, 문화(예술)를 나누는 복지도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이상 누군가 문화예술이라고 정해준 것들을 (그 정해진 것들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에게 나누는 것은 베푸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누구나 문화예술을 창조할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것이 문화복지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노인을 "위한" 문화(예술)을 나누어주는 복지 정책이 아니라, 노인들이 문화예술활동을 함에 있어 (장벽이 낮은)환경을 제공해주는 것이 문화복지 정책의 방향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문화복지가 실제 무엇인지는 이제 사실 중요하지 않은 시점인 것 같다. 마치 "보수적"이란 말에 대해 이제 어느 정도 뉘앙스가 정착되어 실제 의미와는 무관해진 것 처럼. 

 

한국사회에서 "복지"란 단어가 들어가는 순간, 모든 것이 뜨거운 감자가 된지 꽤 오래된 것 같다.

복지welfare의 뜻은, 사실 well-being에 가깝다.  당연히-뭔가 가진 사람들의 것을 빼앗아, 다른 사람들에게 퍼주기(?) 하는 그런 것은 아니다.

늘 어딘가에는 나(개인)와 다른 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나이가 다를 수도 있고, 성별이 다를 수도 있고, 성격이 다를 수도 있으며, 정치적 성향도 다를 수 있고, 지닌 학력이나 경제자원이 다를 수도 있다. 문제는 나(개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어떤 집단을 없애버릴 수는 없다. 한민족국가를 이루기 위해 다른 나라에서 방문하거나 거주하는 사람을 막을 수 없으며, 다문화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무조건 이민/이주를 강제할 수 없다.

모두 비슷하게 살면 좋을 것 같지만, 역사적으로 비슷하게 살기 위해 시도했던 많은 정책들 (강제이주, 학살 등으로 기억된다)이 실패해왔으며, 현재 남미 등등 타 국가들에 있는 gated community들을 떠올려본다면 그것이 사회적 안정을 절대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 더 심각한 불안정과 위험을 가져온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당장은 문 안쪽이 안전하고 편리할 것 같지만, 문 밖은 더 급격하게 공존하기 어려워진다. 이질적인 것에 대한 두려움이 얼마나 심각한 위험을 가져오는지 떠올릴 수 있다면, 다름과 다양함이 가지는 건강성에 대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공간차원의 엄청난 변화 속에서 현대사회의 다양해짐은 피할 수 없다. 이런 다양함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만족과 불편의 상태는, 그러므로, 현대사회의 default기본 조건에 해당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래서 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어떤 (정책적) 직간접적인 지원을 할 수 있는가가 현대사회의 복지를 설명하는 더 가까운 말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학자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개념/주장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개념들이 뜨거운 감자라면, 학자들이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거나, 문화복지든, 복지든 관련 정책입안과정에서 제대로 된 공공 담화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해온 것이다.

  

누구를 위해 누가 무엇을 나눠줄 것인가가 대화의 중심이 된다면, 분명 문화복지는 더이상 유효한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현대사회의 다양성이라는 불편함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모두의 문화예술참여환경 조성을 위한 정책이라고 할 때, 우리는 더 많은 가능성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휴... 나도 안다, 이런 이야기가 막막하게 들린다는 것을. 
그래서 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표현하는 솔직한 답답함과 분노를 직면했을때,
그것을 진실하게 대응하기 위해 나에게도 여전히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2019' 카테고리의 다른 글

70세 사망법안, 가결? 고령사회적 상상력.  (0) 2019.07.24
엉뚱한 분풀이를 당했다.  (0) 2019.07.23
2019년 봄학기를 마치며.  (0) 2019.07.19
[암호해독자]를 읽었다.  (0) 2019.07.19
가장 보통의 드라마 (2019)  (0) 2019.07.18
Posted by a.to.z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