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순의 용서에 관하여: 용서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2017) 는,

자크 데리다의 "용서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 로 시작해서 끝난다.

그렇게 편안하게, 용서란 무엇인가에 대한 개인적 고찰에만 아주 침착하게 머무르는 책이라고 읽힌다.


나는 너를 용서한다...라는 진술의 문제- 즉 피해자가 우월한 위치로 이동하며 다시 가해자에 대한 피해자의 폭력성을 드러내게 된다는..-에 집중하며, 데리다의 무권력의 용서라는 개념을 설명하려 한다.


과연 그럴까?

예수의 무조건적인 용서를 피해자에게 기대하는 것은, 누구를 위한 일일까. 
그런 개인적 차원의- 저자 자신도 거의 이상이라고 느끼는- 용서는 과연 사회적 차원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
몇몇 철학자들의 논리와 저술에 빌어, 용서가 필요한 상황을 발생시키는데 책임이 있는 가해자와 사회구조에 대한 고찰을 거의 생략하다시피 할 수 있었다는 저자의 거리감이 나는 부럽기까지 하다.  


화해라는 순진한 이상만으로 

인간의 용서에 얽힌 아픔과 일그러진 욕망을 용서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느낌이었다.

피해자의 상처로부터 저자가 데리다를 이용해 만들어낸 거리감은, 

가해-피해자 간 균형을 잡고, 고민이 필요한 지점을 제시했다기 보다는,

용서란 이름으로 행하는 피해자들에 대한 또하나의 폭력을 잘 드러냈을 뿐이라고 느낀다.


무조건적 용서와 무권력성의 용서가 가해자의 행위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인가.

결국 가해자의 잘잘못이 사회적으로 드러남으로써, 가해자가 무언의 도덕적 압력을 받게 된다는 설명은, 

인류가 그간 저질러운 처참하고 잔인한 가해의 행위가 가져온 깊고 다층적인 직간접피해자들의 상처를 압축적으로 피해갔다. 

저자에게 묻고 싶다.  다양한 미성년자들이 연루된 최근 잔인한 사건들에서, 피해 어린이들에게- 가해 청소년들도 너희로 인해 도덕적 압력을 받고 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현대사회의 권력, 힘, 제도의 내재된 폭력성, 재생산되는 구조를 지나치게 가벼이 여겼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용서할 수 있는 정부는 없습니다.  정부는 나의 고통과 아픔을 알지 못합니다.  오직 나만이 용서를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용서를 하기 전에 먼저 나는 진실을 알아야 합니다." (Alex Boraine, Janet Levy, and Ronel Scheffer, eds. Dealing with the Past: Truth and Reconciliation in South Africa (Cape Town: Institute for Democracy in South Africa, 1994:12)  강남순 2017:148)

나는, 이 문장의 핵심은 "고통과 아픔을 알지 못합니다." 라는 부분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서두에서 분명하게 현대사회에서 용서라는 개념이 조명받는 이유를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책 전체를 끌어가는 논리에서는 용서의 또다른 영역, 즉 가해라는 측면에 대해 다루지 않음으로써, 편안하고 이상적인 일상적 수준의 용서 개념에 머물렀다. 


기대하고 읽은 책이었는데, 몹시 실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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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발전과 성장

2016. 2. 29. 04:13 from 생각.


어제밤 무한도전 나쁜기억을 지워드립니다란 편을 봤다. 

아버지의 죽음을 지키지 못한 아들..의 아빠 죄송합니다 를 힘겹게 쓰고 지우는 모습은

나의 그것과 비교해선 안되지만, 

결국은 맞닿아 있는 것 같다.

왠지 모르게 망연자실해지는 그 모습은 내가 무기력해지는 것과 같아 결국 울고 말았다.



한국의 발전과 성장에 대한 외국 글들을 보면 슬퍼진다.

(http://www.mckinsey.com/global-themes/asia-pacific/south-korea-finding-its-place-on-the-world-stage)

내 눈과 귀에는 아픈사람들이 보이고, 그들의 울음이 들린다. 

괴롭다.  분리가 되어야만 그들을 도울 수 있다는 말이 어쩐지 괴변으로 들린다.

내가 말하는 사람들은 노숙자들이 아니라, 

아이를 어린이집에도 시댁친정에도 이웃에게도 맞길데는 없는데 일을 나서야 하는 이시대의 젊은 아빠엄마들이다.

그렇게 남겨져 어린나이에 경험하지 말아야 될 일들에 무방비로 노출된 어린아이들을 말하는 것이다.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아도 결국은 외면한다는 괴로움에 듣고 볼 수 밖에 없다.

아무 것도 해줄 수 없기도 하지만, 

내가 누리는 것들에 대한 경멸이 나 자신에 대한 경멸로 이어지는 것 같다. 


한국의 발전과 성장은, 

결코 위정자들의 천재적이고 위대한 리더십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잘못된 선택 안에서도

잘사는 나라를 일구어내고자 하는 선한 열망을 품고 살아온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기적이다.


잘잘못에는 경중이 없다고 하지만, 

타인의 삶을 저울에 올려놓은 선택에 경솔함이 있을때, 

그로인해 벌어진 일들이 권력과 대의라는 유연함을 등에 업고 

제도 안에서 처벌받지 않을때. 보호받을때.

그래서 결국 개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칠때.

사람들은 실망한다. 이러한 실망은 쌓이고 쌓여 분노와 상처가 된다. 

윤태호 작가의 말대로 일상은 무너진다.

왜냐하면, 일상이란 것은 결국 사회의 약속-즉 제도- 안에서 만들어진 틀이기 때문이다.

숨쉬듯 당연하게 디자인된 것들마저 훼손되고, 딛고 일어서려고할 기반마저 흔들릴때

그것마저도 대의로 받아들여야할때 사람들은 죽어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처는 한두번의 위안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전체사회가 천천히 깊숙하게 찔린 상처가 곪아가는 것이다.

젊은날 갑작스레 찾아오는 죽음이 우리사회에 오고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이런 고민마저도 사치인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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訃告. 나의 아이폰5s

2015. 8. 19. 17:02 from 생각.

아이폰5s를 물에 빠뜨렸다...

난 아직 이 아이를 보낼 준비가 전혀 안되어 있어서인지 너무 우울하다.  비웃어도 할 수 없다.  

정말 진심으로 슬프다.



난 변함없이 좋아하는 것이 정말 열손가락을 아직 다 못꼽는다.

정말이지 변덕이 너무너무 심해서, 가족들은 내가 누군가랑 연애도 못할꺼라고 생각했었다.

핸드폰 같은 경우, 아이폰5s를 갖기 전까진, 구입 후 하루를 못넘기고 불만이 막..견딜 수 없이 올라와 매일 바꾸길 결심하며 지냈었다..


아이폰5s가 그럼 완벽한 핸드폰인가.

절대 아니다. 단점도 사실 없지 않다. 

그래도 나의 단점마냥 안고 살 수 있는 정도였달까나-



정말 너무나 슬퍼서 요며칠 아무생각도 할 수 없다.

연락 안되는게 뭐 대수냐며 고쳐보려고 할일 다 제치고 여기저기 데리고 다녀봤는데... 사망했다.

....리퍼를 구하면 되는가- 같은 모델을 구입하면 되지 않는가라고 생각해봤는데...

나는 아마도 이 아이폰5s를 사용하게 된 계기부터 사용한 나날들 모두를 포함해 애정을 가졌었나보다.

사람마냥 내 온-모든- 마음으로 아꼈던- 지난 1년 6개월 새에 내 손가락 안에 들어와버린....

....그래서 새로운, 혹은 비슷한 기계가 내키지 않나보다. 



지금도 사실 제정신이 아니다. 

급하게 아무폰에다가 유심을 넣어두고 

남은 약정**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봤는데....

아마 당분간은 새 핸드폰을 사고 싶지 않을꺼 같다.

단통법도 있고- 

어차피 2년 내지 3년을 통신사 위주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은 천박한 소비주의라며, 나라가 함부로 핸드폰도 바꾸지 말라고 교육해주고 있지 않은가.

제조사 통신사를 위한 악법이 나의 아이폰5s에 대한 애도를 표하는데 도움이 될지 몰랐다.

(** 참고로 보험을 들어두는게, 약정 의무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침수도 침수 나름이라 말려서 살아나는게 있고, 나처럼 전원도 안들어와서 아예 수리 불가능한 것들도 있다.  나는 바로 전원끄고 쌀통에 묻어서 20시간 후에 수리센터에 갔었다.  응급처치를 잘해도 되는게 있고 안되는게 있다.  skt는 임대폰이 있지만, 지점에서 1달까지만 무료가 있고 그 다음엔 거의 단말기 할부금 급의 임대료가 계산된다.  나는 아이폰5s 구입당시 아주 정직한 방법으로 구입했었다.  나의 정직함에 야유를 보낸다...)


좀더 슬퍼해야지..

내 아이폰5s...

너랑 같이 지냈던 지난 1년 6개월이 너무 행복했나보다- Good bye, my d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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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바라보기

2015. 5. 12. 16:04 from 생각.

고교 국사교과과정에서 근현대사 비중 40% 줄인다고 한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7587622&viewType=pc).
하긴 앞만 보고, 결과만 중요한 인간을 길러내는데 아주 좋은 방법이다.

정말 부끄럽다.
왜 스스로를 아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는지- 마치 사춘기시절이 부끄러워 지워버리는 상처받은 소심한 몸만 어른인 사람마냥.

우리-
언제쯤 스스로에게 당당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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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라

2015. 4. 20. 19:49 from 생각.

일본의 젊은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행복하다는 그런 말.

그 말의 가벼움에 마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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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to.z :

4월은 잔인한 달이다.

세월호의 아픔을 생각하면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 같다.

사실 내 주변에 직접적으로, 세월호와 연관된 사람이 없다보니, 내가 아프다함은 참 공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회적 갈등과 관련한 이야기를 꺼내는데 있어 몹시 주저하는 내가,

오늘 굳이 이 글을 쓰려는 이유는,

타인의 아픔에 대해, 그만 아프라고- 아프지 말라고, 강요할 수 있다고,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두려워서이다.


누구도, 개인의 아픔에 대해 측정할 수 없고, 그래도 되고 안되고를 정할 수 있는 권리는 없다.

아픈건 아픈거다.

위로해줄지 아니할지를 정할 수는 있지만,

아픔 그 자체에 대해 비난하거나, 그게 저렇게 아파할 일이냐를 정할 수는 없다.


죽은 자식을 대신해 돈을 준대서 자식이 물에 빠져죽기를 방치할 부모가 있을까.

(사회면에 나오는 싸이코패스 부모도 있지만, 본인이 그런 부모라고 생각하는 부모가 있을까)

그 돈 받고 아파하지 말아라라고 누구도 말할 수 없다.


제대로 된 국가라면, 한 사람 한 사람 사고로 가버린 국민들에 대해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말이다. 잘잘못을 가리기 앞서, 어떻게 이렇게 된 것인지.

그만큼 알아봐줬으면, 돈 주었으면 되었다는 말은, 뱉으면 안되는 말이다.

충분한 위로라는 말은 위로해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니까.


게다가-답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니다.  

이건 마른하늘에서 소행성이 유람선에 떨어지자 바다가 뜬금포로 갈라져 버린 문제가 아니니까.

사람이 일으킨 사고니까, 

잘 설명하고, 잘 설명하지 못한다면, 설명못하는 능력없음에 사과해야하고, 솔직하게 부딪혀야 하는거라고 난 생각한다.

솔직한 위로가 아니라면, 그때는 변명이다.


세월호 사건 때문에 경기가 나쁘다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

사건을 덮고, 잊으면 경기가 좋아질꺼라 믿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역겨움을 느낀다.

한 사회의 사고/잘못은,

덮고 잊어야 하는게 아니라-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알고- 다음 사고/잘못을 예방할때,

비로소 교훈이 되고, 역사가 된다.


아픈 이들을 함께 도울 생각이 아니라, 사라지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적어도 그 사고로부터 안전했던 사람들이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희생된 이들은, 어떤 면에서 살아남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던 위험을 알려준 사람들이지 않을까.

공감까지 할 수 없데도, 비난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특히-

그만 되었다고 아프지 말라고 말할만큼, 아픈 사람 옆에 진정으로 오래 머물지 않은 사람-

그런 말 할 자격은 없다.


4월이 계속 아프지 않게-잔인하지 않기 위해, 

난 잊지 않고 싶다. 전화위복이었다고 말하는 그날이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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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열정페이라는 말이 나오면, 참 남의 이야기 같지 않다.

불평한다고 하는 일명 어르신들에게 사실 짜증난다.

그들은 틀이 없던 시대에 틀을 만들던 사람들이고, 

지금 젊은 사람들은 그 틀의 장단점 안에 갇혀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 연극치료를 배운다. 

교육과정의 문제점- 이런 것은 말하지 않겠다. 완벽한 것은 없으니까.

단지, 치료사, 심리상담사가 되기 위해 기본적으로 이수해야 한다는 자원봉사 시간이라는게 있다.

문제는, 연극이란 것 자체가 시공간적 제약이 있기 때문에, 

기회가 다른 것에 비해 많지 않다.

나는 지방에 살기 때문에, 서울까지 가기 위해 택시타고 기차역으로 가서 KTX를 타고 가서 자원봉사 1시간 하고, 다시 KTX를 타고 가서, 택시 타고 집에 간다. 

자원봉사이기 때문에 아주 당연하게 나의 돈과 시간을 바친다.

갑자기 취소되면 허탕치고 가야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1시간이, 서울사는 자원봉사자의 1시간과 같다 할 수 없다.


그런데, 지방에 기회가 없기 때문에, 나는 그것에 대해 불평하면 안된다.

오히려 비난도 감수해야 한다.  게으르게 시간 수를 빨리 못채운다고 말이다.


그들은 틀을 만들고 자랑스러워할뿐, 틀의 문제점을 고민하진 않는다. 

지방과 서울 격차가 KTX로 없어진다고 생각하는 나이브한 사람들.


나는 이걸 당장 하지 않아도 굶지 않는다.  그래서 나의 분노는 어쩌면 미약하다.

하지만, 이것이 옳지 않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약한 자의 마지막 땀 한 방울까지 쥐어짜고, 꿈까지 이용하는 그 날, 

틀은 수정되는 것이 아니라 파괴된다.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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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sns가 무섭다.

2015. 2. 19. 19:50 from 생각.

그렇다. 나는 정말 sns가 무섭다.

나의 행동과 나의 말, 그리고 나의 글이 늘 일치할 수 없기 때문이고.

나의 친구들이 모두 같은 의견을 가지진 않지만, 나는 그것을 알리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더 솔직히 말하지만, 그저 변해가는 나의 모습과 나의 친구와 그 친구들의 변해가는 모습이, 

가깝다고 느껴지는 완전한 타인에게 발전 혹은 퇴보의 모습으로 보여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냥. 그 사람으로써 친구를 경험하고, 그 친구가 보여주고 싶은 사람으로 알고 싶다.

한동안 뜸하더라도, 그냥 다시 만났을때 직접 친구에게 어떻게 지냈는지 듣고 싶고...

그 동안은 그냥 그리워하고 싶다.

그리고 그들도 나를 그렇게 대해주길 기대하고 싶다.


그냥 그렇게 나이들어가고 싶다. 


....그리고 어느새!

정말 2015년이 왔다.  

다들 어디에서 무얼하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Posted by a.to.z :